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크릴로프 (문단 편집) === [[대조국전쟁]] === [[오데사]] [[국경]]을 넘으려던 [[루마니아 왕국|루마니아 왕국군]]과 전투를 치르다 패배했다. 이후 [[세바스토폴 공방전]]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도중 포격 때문에 중상을 입었다. 동년 3월 말 복직했으나 부상 후유증을 죽을 때까지 지속됐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external/ww2gravestone.com/image103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{{{#ffd700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작전을 구상 중인 제62군 지휘부[br]오른쪽부터 [[쿠즈마 구로프|{{{#ffd700 쿠즈마 구로프}}}]] 중장, [[바실리 추이코프|{{{#ffd700 바실리 추이코프}}}]] 중장, 니콜라이 크릴로프 소장}}}'''[* 추이코프는 당시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.][* 별이 3개지만 계급은 [[중장]]이다. 장성용 카라 한정 1성 카라장에 별을 2개 박기 때문.] || 제1근위군 사령관을 역임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제62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. 크릴로프가 도착하기 전까진 [[바실리 추이코프]]가 지휘를 맡았다.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를 함께 치르면서 그 둘은 절친이 됐다. 승리 후 크릴로프는 제3예비군 사령관을 역임했다. 1943년 10월부터 [[스몰렌스크 전투(1943)|오르샤, 비텝스크 탈환 작전]] 당시 제5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다. 용맹한 진격과 공격을 선보인 크릴로프는 1945년 4월 [[소련 최고회의]] 법령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획득했다. 1944년 10월부터 12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치료 후 [[동프로이센 공세]]에서 또 다시 두각을 드러내 부대를 승리로 이끌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